
아마 한 삼천번 정도 쓰고 고치고 또 쓰고 올린 글로 기억.
뭐 지금까지 디씨 등에서 내 활동을 지켜 본 냥반들이야 알겠지만, 난 국내에서는 그닥 보기 힘든 스페인 내전 빠다.
서구권에서는 정치적 이유이든, 밀덕들의 흥미든, 순수한 학문적 관심이든-첨언하자면 스페인 내전은 두 측면 모두 떡밥 무는 인간들을 양산해 낸다-스페인 내전이 근현대사에서 워낙 상징성이 큰 사건이기 때문에 빠돌이들이 썩어 나나, 적어도 내 개인적인 관찰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영 주목을 받지 못하는 주제인 듯 하다.
스페인 내전이 근현대사에서 가지는 그 독특한 상징성을 생각하면 상당히 아쉬운 현상인데.
요 근래라도 안토니 비버의 저서가 번역 된 것을 비롯하여 (책 자체는 내 판단 하기에는 비판 여지가 꽤 있다만) 그럭 저럭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생기는 듯 한건 대단히 환영할 만한 일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근현대사 또한 스페인의 그것과 대조하며 고찰 해 볼 여지가 큰 상황에서 스페인 내전의 연구가 역사학적으로나, 시사적으로나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 된다.
어쨋든 이런 저런 잡설은 집어 치우고, 본문에 대해서 설명을 하자면, 흔히 세간에서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국의 패전을 설명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이념적 내분을 꼽는데, 전적으로는 맞는 소리지만, 역사적 실상을 보면 반대편의 국가군 또한 공화파와 비할 만한 내부적 불화를 겪고 있었다. 이 글은 그 국가군의 내부적 구조와 그에 따른 취약성, 그리고 공화파가 극복 하지 못한 그 문제를 국가군은 어찌 극복하였는가 다룬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스페인 내전 발발 초기 쿠데타 군의 상황은 지극히 취약했다. 공화국 정부의 무능함과 형편 없이 느린 대응으로 인하여 사라고사와 카디스를 비롯한 동부의 주요 도시는 대부분 장악 하는데 성공 하였지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등 정치, 경제적으로 스페인의 핵심적인 도시들은 공화국 손에서 빼았는데 실패하였다. 정치적으로도 원래 쿠데타의 총 지도자였으며 새로운 정권의 수장이 될 호세 산훌호 장군은 식민지에서 본토로 비행기 타고 건너 오는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 (추락 원인은 산훌호가 "나는 이제 스페인의 국부가 될 사람이다"라는 이유로 비행기의 적재량을 훨씬 초월하는 무게의 옷과 의장을 실었기 때운이라던가), 몰라, 프랑코와 함께 쿠데타 집행의 3두 지휘관 중 하나였던 마누엘 고데드 료피스는 바르셀로나의 봉기가 CNT의 역 봉기로 인해 실패하면서 체포 당한 뒤 총살, 그리고 또한 쿠데타 군의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였던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당, 팔랑헤의 창설자이자 지주였던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디 리베라는 알리칸테에서 체포당해 사형 당하는 등 지도부에 심각한 타격을 받아 쿠데타 군은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없다지만, 애초에 쿠데타 관련 정보 자체가 군부 내의 친 공화국 세력을 통해 공화국 정부에게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 하면, 공화국 정부가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 있는 쿠데타 관련 정보를 애써 무시하고, 쿠데타가 발발 했을 때 현실을 부정하고 무능하게 대처 하다가 쿠데타 군에게 눈뜨고 당하지만 않았다면 쿠데타 자체가 붕괴된 후 잇따라 쿠데타를 지원하던 지주, 교회, 팔랑헤, 카를로스파, 왕당파 등이 모두 한꺼번에 쓸려 버렸을 지도 모를 노릇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공화국 정부가 당장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보다 자신들을 선출 해 준 국민들을 더 믿지 못하여 당시 스페인에서 가장 거대하고 의욕이 넘쳤으며, 사라고사, 카디즈, 말라가 같은 쿠데타 군이 초반에 장악한 핵심적인 지역들에 쿠데타 군 보다 훨씬 많은 수로 포진해 있었던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 민병대들에게 무기 배포를 하지 않았던 삽질만 하지 않았던가, 하면 말이다. 쿠데타 군이 민병대 떨거지에 비하면 훨씬 더 훈련도 잘 되 있었고, 기강도 잡힌 '진짜 군대' 였다는 사실도 프랑코 휘하의 아프리카 군단이나 혹은 레퀘테라고 불린 나바레 지방의 카를로스파 민병대에게만 해당되었지, 스페인 정규군의 대부분은 단적으로 모로코 식민지 반란 하나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는 밥벌레 수준의 무능한 군대였으며, 다른 병력들 또한 UGT나 CNT의 민병과 다를바 없는 팔랑헤 소속의 준군사 조직이나 CEDA 같은 기존 보수 정당의 지지자들이 총을 든거에 불과했고, 공권력의 일부인 경찰이나 돌격대 (Assault Guard, 다른 유럽 국가들의 gendarme와 비슷하게 경찰 업무를 집행하는 군 병력) 또한 조지 오웰의 말을 빌리자면 "지극히 스페인스럽게" 기강이 해이하고 민병대에 비해 별로 나을게 없을 병력이었다. 개전 초기의 공화국 정부 자체의 무능함만 아니었다면 오히려 개전 초기 상황은 여전히 공화파가 인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유리하고, 되려 CNT나 UGT 같은 조직은 아라곤 일대를 장악하여 혁명을 일으킨 일이 보여 주듯 아예 쿠데타를 인민 혁명을 향한 하나의 기폭제로 보며 당장 쿠데타 군은 물론이고, 공화국 정부 까지 뒤엎어 꿈에도 그리던 혁명 자체를 전 스페인으로 확산 시킬 기세였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공화국 정부는 내전 발발 초기 공화국 편의 가장 강력하고, 실질적으로 유일한 무력 집단이었던 CNT-FAI와 UGT에 대한 지원과 물자 보급을 중지해 버려서 오히려 전쟁에서 승리는 물론이오, 후환이 될 파시스트, 보수파, 왕당파, 카를리스트 같은 쿠데타 군에 들러 붙은 적대 세력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릴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놓쳐버렸다. 이에 대한 간단한 이유는 바로 위에서 설명 했듯이, 공화국 정부 자체가 혁명적인 기운으로 가득차 있었던 아나키스트나 사회주의자들, 소위 '혁명 세력'들을 불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째서 바로 그 좌파 프롤레타리아 정치 세력을 기반으로 집권한 인민 전선이 자기들의 지지 기반인 혁명 세력을 믿지 못했냐 하니, 그 이유는 비록 지지 기반은 같은 프롤레타리아나 지식인들이었지만, 공화국 정부가 추구하는 노선과-뭐 그런게 구체적으로 있었다면 말이지만-CNT, UGT, POUM 같은 민병대와 노동자, 농민을 주축으로 한 혁명 세력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비전은 거의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드리드에 있는 공화국 인민 전선 정부는 그 이름이 보여 주듯 원론적으로 사회주의자,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는 공산주의자, 쁘띠 부르주아지, 온건 공화파, 민주주의자 등 다양하며 심지어 이념적으로는 반대 성향의 정치적 세력들이 연합한 정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민 전선 정부의 다양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들과 종종 행동을 같이 하며 여전히 반정부 색체가 강하였던 UGT와 그 대표 정당인 PSOE의 사회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이 모든 제 2공화국을 구성하는 정치 조직들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적 공화국 체제의 유지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이해 관계를 공유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요소는 훗날 혁명 세력들이 힘을 잃고 공산당이 인민 전선을 손에 넣으면서 더욱 심화되었는데, 원칙적으로 보면 중소 기업가들이나 상인들 같은 소 부르주아지가 핵심이 되는 마누엘 아사나 대통령이 이끄는 공화주의자들과 초기에는 작은 세력으로 시작하였지만, 소련의 지원이라는 강력한 카드로 인하여 인민 전선 내에서 점차 영향력이 증가한 스페인 공산당은 이념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나 영국의 공산당들의 활동이 보여주듯, 히틀러에게 맞서기 위해 서방에서 의지 할 만한 동맹을 찾고 있었던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스페인 공산당은 오히려 스페인의 그나마 있는 공업과 국력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상유지'라는 공동의 깃발 아래 뭉칠 수 있었던 인민 전선 정부와 달리, 1936년 전쟁 발발 당시 그 머릿수와 조직력으로 공화국을 구원하였으며, 당장 가장 큰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던 거대 아나키스트 군사 노조, CNT-FAI는 일시적으로는 공화국과 손을 잡았지만 마드리드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따를 생각도 없었고, 현상 유지라는 목적 또한 공유하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만 하더라도 파시스트나 우익은 물론이오, 좌익 정부에게도 적대적이었던 CNT-FAI는 "전쟁에서 이긴 후에 혁명"이라는 슬로건을 내새웠던 공산당과 인민 전선의 강령과는 달리 "전쟁과 혁명은 불가분의 관계"를 주장하며 점령지에서 계획해 왔던 아나키스트 혁명을 추진하였고, 그에 따라 아나키스트 민병대가 점령한 카탈로니아 지방 또한 중앙 정부의 통제가 닫지 않는 무정부 자치 구역이 되었다. 전쟁 초기 인민 전선 내 다수파가 아나키스트들과 여러모로 친분이 깊은 PSOE 소속 사회주의자들 이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러한 아나키스트들의 강력한 위세는 지속적인 중앙 정부의 견제에도 불과하고 유지되었지만, 소련의 지원 문제로 인하여 점점 힘을 불린 공산당이 마침네 1937년 바르셀로나 5월 사태로 인하여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자 이러한 혁명 세력들의 독립적인 행동은 완전히 분쇄되었다. 이후로 공화국은 패망 까지 점점 냉전 체제 당시 동유럽의 소련의 위성국을 연상 시키는 스탈린주의적 독재 체제로 흐르며 군사적으로 무의미한, 순전히 공산당 자신들만의 정치적인 이유로 계획된 브루네테 공세, 테루엘 공세, 에보로 공세 같은 뚜렷한 목적도, 의의도 없는 군사적 모험을 남발하다 멸망하게 되었다.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의 정치적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선전 포스터. 물론 이 포스터가 실제 역사를 그대로 반영 하였다면 아마 저 대가리는 뇌가 울끈 불끈하며 편두통으로 쓰러졌으리라.
이렇게 전쟁 초기의 분열을 살펴 보면 역시 공화국 패망의 핵심적인 이유는 내부적 분열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이유는 공화국 자체가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공화주의자, 바스크와 카탈로니아 민족주의자 같은 이념적으로 완전히 노선을 달리하는 집단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쿠데타 군의 성공 요소는 바로 이러한 심각한 내분의 부재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으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것이, 사실 생각해 보면 인민 전선 공화국 못지 않게 개전 초기에는 훗날 프랑코의 일인 독재 아래 '국가군'으로 탈바꿈 한 봉기군의 내부 구성 또한 내부적 분열이 심한 각기 다른 정치적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단적으로 예시를 하나 들자면, 10년도 못간 제 2 공화정 당시 프랑코와 군부가 직접 반기를 들기 이전 공화국 체제 자체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세력은 놀라울 것 없이 1931년 알폰소 13세의 하야 이후 국정에서 쫒겨난 왕당파였다. 문제는 이 스페인 왕당파 또한 두개의 서로 잡아 먹지 못해 앙숙이었던 계파로 나누어져 있었으니, 하나는 1833년 당시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가 후계자로 지정한 이사벨라 2세 부터 알폰소 13세 까지 지속적으로 내려온 스페인 왕실을 지지하는 '정통파'였고, 다른 쪽은 1833년 당시 이사벨라 2세가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의 계승을 반대하며 대신 왕의 동생, 카를로스 5세, 즉 돈 카를로스의 계승을 지지하며 스페인 왕좌를 위해 19세기 내내 내전을 벌여왔던 카를로스파, 혹은 카를리스타들이었다.
내전 자체라는 주제에서 벗어 나고 싶지는 않으나, 이 카를리스타들은 스페인 역사 내에서 차지하는 그 고유한 위치 때문에 기원과 성격을 설명할 필요가 있으니, 이들의 기원은 일단 19세기 중반 스페인에 있었던 왕위 계승을 둘러 싼 내전에 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19세기 스페인 왕위 계승법은 당시 샤를마뉴때 부터 내려온 여성의 왕위 계승을 금지한 살리카 법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이 법에 따르면 왕의 자식 중에 아들이 없으면 왕위는 동생, 즉 당시 스페인 왕이었던 페르난도 7세 입장에서는 동생 카를로스 5세에게 왕위가 넘어 가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혈육에게 왕위를 남기고 싶어 했던 페르난도 7세는 1830년에 특별 칙령인 왕위계승령을 (Pragmatica Sancion 혹시 이 단어가 왠지 익숙한 독자가 있다면 18세기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제위를 두고 일어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발단이 된 그 칙령 맞다) 발표하여 딸 이사벨라 2세가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다고 선포하였다. 이에 반발한 왕의 동생, 돈 카를로스가 반기를 들자 단순한 왕위 계승을 둘러 싼 분쟁은 당시 스페인 사회의 역사적 변화를 중심에 두고 있는 거대한 정치적, 사회적 분열 사태를 초래하였으니, 스페인의 근대화가 이루어 지면서 점점 소외 되어 가고 있었던 극단 전통주의 세력이 돈 카를로스의 깃발 아래 하나의 체계화 된 정치적 세력으로 결집 한 것이다. 바로 이전 나폴레옹의 침략과 혁명기 프랑스의 스페인 통치 이후 서서히 도입되었던 종교 제판 폐지, 토지의 국유화,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의 확산 같은 스페인의 근대적 변화는 중세 이후 전투적 보수 카톨릭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스페인 사회에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가져왔고, 이러한 과정은 카톨릭 교회와 구 귀족 같은 기득권 층에서는 물론, 지금까지 자영농이었다가 공업화와 토지 국유화로 인하여 졸지에 몰락한, 특히 전통적인 자치권 마저 박탈 당한 바스크 지방의 농민들 같은 하층민들 까지 골고루 원한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통하여 돈 카를로스의 반발은 단순한 한 시대의 왕위 계승 분쟁의 차원을 넘어 1차 카를리스타 전쟁이 발발한 1830년대만 하더라도 나라의 반쪽이 돈 카를로스의 편에 붙는 위세를 떨치며,19 세기에 걸쳐 세 차례의 내전을 치루며 왕위를 위협한 카를로스주의라는 극단적 전통주의를 표방하는 구체적인 정치 이념으로 성장하였다. 1930년대 당시 카를로스파는 전 시대에 있었던 내전들에서 패배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정통' 왕가를 표방하며 스페인 사회의 가장 보수적이고 극단적인 정파 중 하나였다. 이 카를리스타들은 왕정 복귀 또한 1931년에 하야한 '가짜' 왕손인 알폰소 13세가 아닌 카를로스 계파 왕위 계승자였던 산 하이메 대공 알폰소 카를로스의 복귀를 주장하였으며, 당연히 이는 왕당파의 또다른 계파였던 정통파들의 입장과는 이념은 둘 째 치고, 당장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입장이었다.

카를로스주의, 혹은 스페인어로 카를리시모의 깃발. 카를리시모 자체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복귀를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합스부르크 시절 스페인의 상징이었던 쌍두 독수리와 부르고뉴 십자가는 합스부르크 시절과 같은 전통적 스페인 사회로의 귀환을 상징한다.
설상가상 격으로 내전 발발 당시 그나마 이 두 세력은 최소한 왕가를 지지한다는 측면에서 일치하는 점이 있었지만, 당시 쿠데타군을 형성하는 세력 중에는 이 둘 뿐만 아니라 스페인 자치 우익 연맹 (CEDA) 라는 같은 다른 유럽의 우익 정당들과 유사한 자본가, 대지주가 중심인 공화국 체제 내의 정당과 파시스트 정당인 팔랑헤 또한 속해 있었다. 프랑코의 이념은 워낙 보수성과 전통에 대한 스페인 사회의 여건 상 이탈리아나 독일의 파시즘과는 달리 미래 지향적인 성격의 전체주의가 아닌, 근대 이전의 전통적인 권위주의 사회로 희귀하려는 봉건적인 성격이 강하고, 이러한 스페인 보수 세력의 전통에 대한 집착과 광적인 카톨릭 신앙은 같은 우익 도시 부르주아나 지식인들에게도 많은 반발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군부 주도의 보수 쿠데타가 일어 났을때도 마드리드, 세비야,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의 소 부르주아들과 관료들은 많은 수가 공화국의 편에 붙은 반면, CNT-FAI나 UGT 같은 노조 혁명 세력의 위협에 정면으로 노출된 공장주, 대지주들은 프랑코의 편에 붙어 실상을 따지고 보면 쿠데타 군은 (경제적 의미에서) 같은 우익 계열 또한 완전히 장악하지 못 한 셈이었다. 그나마 쿠데타 군의 편에 붙은 CEDA와 같은 자본가들 중심의 우익 정치인들 또한 19세기의 고전적 자유주의에 역사적 기원을 두었다는 이유로 카를리스타 같은 전통주의 세력에서는 좌익 정당 못지 않게 증오를 받고 있었고, 군사 쿠데타가 실패 하였을때 봉기가 완전히 진압 당하지 않고 반란군이 재수습을 할 기회를 제공한건 이 전부터 정부의 비호 아래-아이러니컬 하게도 공화국 정부는 기존의 왕당파에 대항하여 이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카를리스타들에게 군사 훈련과 장비를 지원해 주었다-민병대와 무기를 비축해 두었던 카를리스타였다는걸 고려하면, 이러한 내부적 앙숙 관계는 반란군의 통합성을 고려 할 때 굉장히 첨예한 문제였다.
안 그래도 이리 내부적으로 복잡하였던 쿠데타 군 내부의 정치적 이념 불화 문제에 결정적인 위협을 가했던 것은 스페인 판 정통 파시즘을 주장하며, 쿠데타와 내전 초기 수 많은 민병을 제공하여 쿠데타 군의 존립과 성공에 큰 기여를 했던 팔랑헤당이었다. 이 팔랑헤는 1920년대 스페인의 독재자였던 미구엘 프리모 디 리베라의 아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디 리베라가 무솔리니에게 영향을 받아 창설한, 말 그대로 무솔리니의 '순수' 파시즘을 스페인에게도 도입 하겠다는 목적의 정당으로서, 탄생 배경이 이러 하니 팔랑헤는 무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 같은-바로 그 전통주의자들이 뿌리를 뽑기 위해 쿠데타에 가담했던-미래 지향적이며 혁명적인 사회적 비전을 주장했다. 또한 결정적으로 안토니오 디 리베라의 파시스트 이념 또한 이탈리아 파시스트와 나치즘의 국가 중심의 좌파적 성격이 어느 정도 가미 된, 대중적 노동 운동으로서의 면모 또한 강하여-실제로 팔랑헤의 정치적 구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좌빨과 나라를 좀먹는 자본주의 돼지들의 동시 척결" 같은 내용이었다-좌익 정부에 반발하여 쿠데타 군과 뜻을 같이 한 부르주아와 지주 중심의 보수 우익들과도, 전통적 사회로의 휘귀를 주장했던 왕당파와도 공존하기 힘든 입장이었다.

이건 팔랑헤의 깃발. 화살들 아래 놓여있는 소 멍에가 상징 하듯, 팔랑헤 또한 근본적으로 노동 운동으로서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가군의 내부 사정과 내전 초기 쿠데타 군의 구체적인 지휘 체계를 보면,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국을 붕괴시키기 위해 싸웠던 세력을 모두 "프랑코파"로 뭉그러 뜨려서 부르는 것은 역사적 오류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부적 이념 문제를 재쳐 놓고, 당장 공화국을 전복 시키기 위한 우익-왕당파-교회-파시스트들의 반란은 결코 프랑코 혼자서 시작 한 것도 아니요, 프랑코 주도로 일어난 것도 아니며, 처음부터 프랑코 지휘 하에 모두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원래 반란의 총 책임자는 본문에서 설명한 사고로 죽은 당시 스페인 군부의 원로 였던 호세 산훌호였고, 북부에서 반정부군을 지휘한 에밀리오 몰라는 내전 도중 사고로 죽을 때 까지 프랑코와는 분리된, 동등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내전 초기만 하더라도 퀘이포 디 야노 같은 봉기군 고위 지휘관 다수는 뚜렷한 수직적인 지휘 체계 없이 독자적 행동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파시스트도 아니고, 정통 계파든, 카를로스 쪽 분파든 어느 한 왕손을 모시는 것도 아니며, 경제적으로도 뚜렷한 색체가 없었던 프랑코가 공화국을 전복하기 위해 들고 일어 선 그 다양한 정치 세력을 다 대표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이렇듯이 쿠데타 군 또한 사실은 공화국 못지 않은 내부적 모순을 안고 출발하였고, 실제로 내전 중의 내전이라는 상황 까지 초래한 공화국의 막장성 내분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는 않았지만, 전쟁 도중 본인들 끼리 정치적으로는 물론이오, 물리적으로도 치고 받은 사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결국 쿠데타 군은 내부적 이념적 다양성과 지휘 체계의 혼란이라는 문제를 극복하여 국가군이라는 새로운 조직으로 재탄생한 이후 결국 단결 된 공격으로 성공적으로 공화국을 몰락 시킬 수 있었으니, 이러한 쿠데타 세력의 변화야 말로 프란시스코 프랑코 이 바하몬데라는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결국 훗날 스페인의 독재자로 등극 할 기반을 마련한 핵심적인 과정이었다.
위에서 설명 하였듯이, 프랑코는 내전 초기에 쿠데타 세력을 대표하기에는 확고한 정치적 색체도 없었고, 스페인 국내에서도 다른 군/정계의 인사들에 비하면 그다지 알려 지지도 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뚜렷한 색채 없는-엄밀하게 말하자면 다른 세력들의 색채와 일치 하지 않는 것 뿐이었지만-무난함 말로 프랑코가 다른 모든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국가군의 총 지도자이자 독재자로 오를 수 있는 결정적인 덕목이었다. 과묵하지만 영민하고, 군인 보다는 오히려 정치가에 어울리는 노련함을 가졌던 프랑코는 국가군 내의 세력들을 하나 하나씩 조종하며 서로 충돌 시키고, 그러는 와중 정치 조직들을 전부 자신의 직접 통제 아래 굴복 시켰으며, 이 과정을 통해 그는 결국 팔랑헤의 대중적 파시스트 스페인도, 정통 왕당파의 사람들 기억 속 남아 있던 스페인 왕국도, 카를로스파의 근대의 물결이 밀어 닥치기 이전 신앙와 전통만 있는 중세의 스페인도, 자본가들의 공장과 대농장이 번영하는 자본주의 스페인도 아닌, 이 모든 요소를 결합한 동시에 배척하며, 무엇보다 자기 개인의 손 아래 모든게 돌아가는, 자기 이름과 국가가 일치하는 프란시스코 프랑코라는 개인이 군림하며 모든 결정을 내리는 스페인을 만들었다.
국가군 내부의 분열의 기운은 36년 후반부 부터 개전 직후 지도자 호세 안토니오 리베라를 상실 한 뒤 정규 국가군에게 휘둘리고 있었던 팔랑헤의 내부에서 소위 '붉은 파시스트', 즉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본따 국가 중심의 반 자본주의적인 노동 운동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다른 정치 집단과의 연합 때문에 주장하지 못했던 좌익 대중 노선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 하면서 본격적으로 문제화 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국가군 내 '빨갱이 파시스트'들의 움직임은 기타 우익-보수 세력들을 경각 시키기에 충분했고, 머지 않아 팔랑헤 내부에서 이 '빨갱이' 팔랑헤와 다른 세력들과의 동조를 중시 하였던 우익 팔랑헤가 서로 총격전을 벌이며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이 충돌을 빌미로 프랑코는 팔랑헤를 "좀 더 전쟁의 총체적인 수행에 접근 시키기 위해" 강제로 마찬가지로 정규 국가군에게서 독립된 군사 집단이었던 카를로스파와 결합 시켜버린 다음, "전통 스페인의 국가 노동주의 공세 연합의 대열 (Falange Española Tradicionalista y de las Juntas de Ofensiva Nacional-Sindicalista, 줄여서 FET y de las JONS)"라는 길고 복잡한 이름의 실질적인 자신의 하수 조직인 정당으로 만들었다. 내전 초기만 하더라도 쿠데타의 다른 지도자들이 결코 용납 할 리가 없는 독단이었으나, 당시 유일하게 스페인 내부에서 활동 하고 있었던 프랑코와 동격의 쿠데타군 지도자 에밀리오 몰라는 내부 정치 투쟁에 신경 쓰기에는 자신이 담당하고 있었던 북부의 바스크 전선에서의 상황 때문에 너무 바쁘고, 팔랑헤의 정신적 지주인 안토니오 디 리베라는 이미 죽었고, 돈 카를로스의 후손인 돈 하비에르나 그의 가신 팔 콩데 같은 카를로스파의 지도자들은 전부 국외에 망명가 있었으며, 우익 자본가 세력의 거두였던 CEDA 당수 힐 로블레스는 애초에 정치 투쟁에 낄 마음이 없는 인물이었고, 팔랑헤의 다른 지도자들은 모두 프랑코가 굴복 시키거나 숙청 시켜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결국 1937년 6월에는 유일하게 프랑코와 동등한 지휘권을 지니었으며 그와 더불어 살아 남은 쿠데타의 원래 지도자 중 하나였던 에밀리오 몰라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하면서 (이런 경우가 늘 그렇듯이, 이 또한 산훌호의 추락사와 더불어 이 또한 프랑코의 음모였다는 설 또한 있다) 프랑코는 결국 유일무이 한 반 공화국 쿠데타 세력의 총 지도자로서 정식적으로 등극 할 수 있었다. 국가군의 최고 수장으로 등극한 프랑코는 전쟁이 지속되며 공화국의 파국과 자신의 승리가 점점 굳어짐에 따라 내전 이후 통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지기 위해 국가군 내부의 대대적인 이념적 수술과 재편에 박찼다.
프랑코가 다른 여러 정치적 세력들을 하나 하나 씩 굴복 시키며 자기 개인의 통제 아래 놓은 과정을 간략하게 정리 하자면, 위의 팔랑헤의 굴복이 보여 주듯, 각 정치적 집단들을 자신 밑으로 오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 넣은 뒤, 적절한 타협안을 제시하여 끌어 들이는 정형화 된 패턴의 반복이었다. 그는 우선 "적절한 시점에서" 왕정을 복고 한다고 약속하여 왕당파의 지지를 끌어 내었으나, 카를리스트 전쟁 이후 이어진 정통파 계보의 왕이었던 알폰소 13세의 복고는 금지 하고, 또한 세속적 교육, 교회의 승인을 받지 않은 결혼, 이혼, 집 안에서 이루어 지는 사적 행위를 제외 한 다른 종교 활동 금지 등의 극단적으로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사회 정책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적, 사회적 독점을 추진하여-훗날 바티칸 자체가 점차 진보적으로 변하면서 이 또한 큰 문제를 일으키나, 그건 적어도 30년 뒤의 일이다-카를리스트들의 지지 또한 확보하였다. 또한 그는 CNT-FAI, UGT 같은 혁명적 노동 운동을 문자 그대로 박살 내며 철저한 자본주의적 경재 정책을 펴 CEDA를 비롯한 기존 보수 우익 정당 소속의 자본가들의 지지 또한 받으면서도, 공업에 필요한 원료 확보와 공산품 판매는 정부가 독점 관리 하는 형태의 국가의 시장 개입과 노동 기구 (Organizacion Sindical) 라는 전국적 국영 노조를 새워 팔랑헤가 요구한 파시스트적 측면 또한 경제 구조에 반영하였다. 물론 프랑코가 내세운 '국가의 관리 아래 있는 노동 정책'은 이름 뿐인 허울만 좋은 정책이었지, 실질적으로 노동자의 권익이 국가적인 규모에서 향상된 적은 프랑코 독재 내내 한번도 없으나, 자신들의 궁극적인 정치적 기구였던 군사 노조들이 내전으로 분쇄된 이후 노동자들은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조직된 저항을 펼칠 수 있는 조직성 자체를 상실하였기 때문에 쉽게 노동 계급의 반발을 억누를 수 있었다. 왕가 중심의 전통주의 운동 또한 프랑코는 자신의 사후 왕정의 복고를 약속 했으나, 세월이 흘러 카를로스주의 자체가 영향력이 미미해 질 때 까지 후계자 문제를 애매하게 하여 전통파와 카를리스타, 두 왕당파 모두 얌전히 길들였다.
결국 카를리스타를 필두로 한 근대성 자체에 맹렬히 반대하며, 전통 스페인의 복고를 주장하였던 광신적 전통주의자들이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상실 한 체 방황하는 도중 프랑코 정권은 플라멩고, 투우 같은 이전에는 지역적이었던 문화들을 전 국가 차원으로 확산 시키는 것을 예제로 체계적이며 일관된 단일 스페인 국가적 정체성을 다지며, 이와 동시에 교육, 문화, 사회 모든 방면에 국가 권력을 침투 시키는 전체주의 체제의 성립으로 스페인을 파시스트적 요소가 다분한 근대적인 전체주의 독재 국가로 재탄생 시켰다. 이런 식으로 프랑코는 반 공화국 세력들의 내부적인 이념과 이해 관계의 충돌을 모두 정리하며 필요한 부분은 통합시키고, 다른 부분은 억누르면서 복합적이면서도 모순적이고,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처음 부터 끝까지 모든걸 정의하고, 결정하는 궁극의 1인 독재 체제를 만들어 내었으니, 그것이 바로 내전 이후 1975년 프랑코 사망 때 까지 스페인을 지배한 Movimento Nacional, 즉 국가 운동이라는 프랑코 개인이 국가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체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1939년 5월 19일 마드리드에서 승전 퍼레이드 당시 프랑코가 행진하며 착용 했던 팔랑헤의 상징이었던 군청색 컬러를 단 스페인 국군 대장의 제복과 카를리스타들의 전통 표식인 붉은 베레모를 쓴 프랑코의 모습은 이 신생 전체주의 스페인 국가, 그 자체를 상징하는 모습이었다.
쿠데타 발발과 내전 초기 내부적인 이념적 모순으로 인하여 해매는 건 공화파나 국가군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결국 후자의 경우 프란시스코 프랑코라는 하나의 강력한 개인이 이념과 국가를 모두 개인적 권력 아래 흡수한 뒤 이탈리아나 나치 독일식의 파시즘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전통적인 권위주의 통치 체제도 아닌, 이념과 개인이 일치하는 권력 체제를 건설하면서 내부적 상황을 완전히 정리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러한 두 세력의 내부 정리의 차이야 말로 전체주의와 권위주의가 보여주는 잔인하면서도 효율적이기 그지 없는 조직적 성격을 그대로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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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프랑코 독재 체제는 엄밀하게 따지면 무솔리니, 히틀러, 안토네스쿠, 호르히 같은 파시스트 체제라 보긴 힘들다. 하지만 근대적 전체주의적 요소와 자본주의적 경제 노선이 결합되어 있었는 것 또한 사실이여서 기존의 전통적인 보수적 권위주의 정권이라 볼 수도 없다. 결국은 프랑코의 정권과 그 이념은 프랑코 본인, 그 개인 그대로였다는 괴상망측한, 마치 휴전선 위쪽의 세계적으로 유례를 볼 수 없는 한 왕조 국가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덧글
ㄱㅂㄷ 2010/07/29 00:57 # 삭제 답글
흥미롭지라. 비빔밥 쳐묵으면서 미각으로 재료 맞추는느낌
로르카 2010/08/20 02:35 #
정확한 비유임. 그냥 싸우다 보니 당장 머릿수 채우는데 바빠서 이놈 저놈 대충 코드 맞는다 싶으면 다 끌어들인겁죠.